본문 바로가기

월드뷰/2015. 12월호

보고싶은 얼굴-최현일/월드뷰 215, 12월호 스페셜 <낙태, 태어나지 못한 나의 부르짖음>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보고싶은 얼굴

-최현일/월드뷰 215, 12월호 스페셜 <낙태, 태어나지 못한 나의 부르짖음>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수정된지 이틀 되었다. 처음에 하나였던 내 세포는 이제 세 개 네 개의 살아 숨 쉬는 세포가 되었다. 앞으로도 초당 수만 개 이상의 세포들이 내 몸을 채워갈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이곳은 엄마의 자궁 옆에 붙어있는 나팔관 속이다. 나는 이곳에서 약 일주일 동안 앞으로 내 평생을 살아갈 유전지도와 몸의 각 기관들을 만드는 줄기세포들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지금 아주 초기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오기에도 수많은 난관과 역경이 있었다. 나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야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 세상에서 나의 유전적 특징과 표현형의 특징을 가진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인데, 확률적으로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가 만나서 내가 되는 것은 정말로 바닷가 모래알을 찾는 것과 같다. 여자의 난자가 될 수 있는 약 사백 만개의 난모 세포 중에서 하나의 난자와 수천만 개 이상의 정자 중의 하나가 만나서 내가 되는 것이니 그 확률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만났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드라마의 첫 편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난자와 정자가 만난 수정란을 zygote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뜻은 '어려운 짐을 함께 나누어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남녀가 하나 되어 생긴 새 생명의 의미가 삶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지혜롭고 소중하다.


지금부터 새 생명은 약 4cm 정도의 나팔관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앞으로 이 여정을 끝내고도 궁극적 목적지인 자궁 안에 잘 착상해야 하는 험난한 코스가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약 30% 정도는 착상에 실패하여 영영 사라져 버리는 운명에 처한다. 참으로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나팔관의 여정 도중에 어떤 원인에 의해 새 생명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대량의 출혈을 야기하는 자궁외임신이 유발될 수 있다. 삶의 여정 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이런 초기의 어려움은 연약한 새 생명에게는 치명적이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치고 목적지인 자궁내막을 향해 가던 길을 가야 한다.



이제 수정된 새 생명은 일주일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이제 가장 중요한 난관이 남았다. 바로 자궁에 정착을 하는 것이다.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들 수 있는 줄기세포들과 각 세포의 역할을 수행할 유전자배열의 기본기를 완성하였다. 이제는 앞으로 열 달 동안 이곳에서 삶의 여정을 가꾸어 갈 몸과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겹겹이 싸여 있는 자궁내막의 세포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이래서 많은 새 생명이 착상에 실패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떻게 착상을 하는가에 관한 사람들의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나도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나는 나에게 입력된 창조의 섭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생명체로서 안정적인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 착상에 성공하였지만 강력한 엄마 면역체계의 혹독한 면접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 몸은 나와 다른 세포나 단백질 등 생체를 구성하는 물질세계가 다르면 강력하게 거부하는 특징이 있다. '나'인 것만 용납하고 '내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척하는 몸의 특징이 있고 그것을 사람들은 "면역체계"라고 부른다. 사실 새 생명인 나는 반은 아버지의 몸이고 반은 어머니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에게 나는 일종의 '내가 아닌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평상시 같으면 나는 벌써 어머니의 면역체계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몸에 나와 같은 수정된 새 생명이 생기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아닌 것'을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과정을 통해 면역체계의 일시적인 체제개편이 이루어져 새 생명에 대해서는 '나'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세상의 빛을 보기도 한참 전인데. 이렇게 고비가 많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제 면역체계의 껄끄러운 면접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성장과 분화'라는 것을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였다. 그래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각각 몸의 역할에 따라 성장하고 분화해야 한다. 전체가 기능하기 위해서 부분이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겨야 하는 것은 피와 관련된 것이다. 심장과 혈관 그리고 피가 생겨나야 한다. 대개 이 시기가 되어야 비로소 임신 확진이 된다. 그리고 최초의 심장 박동을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외부세계에 내가 살아 있음을 자랑스럽게 알려주게 된다. 이렇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은 이제 평생 동안 내 삶의 중심에서 늘 뛰고 있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몸의 다른 기관들은 심장이 보내주는 피를 통하여 평생을 살아갈 기관을 만들어 나간다. 조금만 지나면 1cm도 안 되는 내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제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이상한 소식이 들려온다.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이 세상에는 우리 같이 어여쁜 새 생명을 반가워하지 않고 새 생명 친구들을 무참하게 없애 버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이른 시기에 생명에 손을 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지금 나와 같이 심장이 생기고 얼마 되지 않은 생명들이 주된 대상이라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참으로 외면하고 싶은 소식이지만 현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나와 같은 새 생명을 인공적으로 제거하는 낙태는 2010년 통계 기준으로 OECD회원국 중 출생아 대비 최고라고 한다. 지금도 한해에 약 20만 명의 새 생명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통계가 작성되던 2010년도에 출생한 생명이 47만 명인데, 출생아의 절반에 가까운 새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아주 초기에 어려운 고비를 넘겨가며 생명을 지켜온 우리 같은 새 생명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팔관 속의 외로운 전진, 힘겨운 착상의 여정, 혹독한 면역체계의 시련을 견디고 이제 아름답게 자라나야하는 시기인데, 수많은 새 생명 친구들이 사라져 가야하는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몸의 크기가 자라야 하고, 신경조직과 운동조직이 역할을 시작해야 하며, 소화기관이 활동하여 대사과정이 안정화 되어야 한다. 오감이 발달하여 외부의 소리도 듣고 반응도 할 수 있다. 내 손가락을 빨기도 하며 태어나서 엄마의 모유를 먹는 꿈도 꾸어본다. 점점 배가 불러와 누가 보아도 내가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나 또한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인다. 아!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아도 나는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생각하고 있고, 반응하고 있고, 내 몸이 일정한 상태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작동하고 있고, 내부에서는 대사과정이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음세대를 이어갈 방법들도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보는 날, 나는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일어나야 했던 수많은 연속적인 창조의 단계들 속에서 누렸던 감격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몸과 마음에 심겨진 보석 같은 섭리의 손길들을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아! 생명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드러나지 않지만 그 어떤 테러보다도 강력하고 조용하게 우리의 새 생명을 앗아가는 생명의 탈취자들을 현상수배 하고 싶다. 그 어두운 거짓 문화의 몽타주를 뿌리고 싶다. 그래서 사라져간 사랑하는 내 친구, 또 다른 새 생명의 얼굴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