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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소명-오스 기니스

21. 한낮에 꿈꾸는 사람/ 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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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낮에 꿈꾸는 사람/ 

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Thomas Edward Lawrence, CB, 1888년 8월 16일~1935년 5월 19일)는 영국 웨일스모험가·고고학자·군인이다. 아라비아의 로런스(Lawrence of Arabia)로 잘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동양어학을 전공하고, 대영 박물관의 탐험대에 참가하여 아라비아와 시리아를 조사하였다. 이 때 아랍에 관해서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정보 장교로 참전하였고, 아랍군을 지휘하여 아랍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아라비아인에게 헌신적으로 활약하여 아랍인들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런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후(戰後) 그와 함께했던 파이잘 왕자는 이후에 이라크의 왕으로 즉위하였다(파이잘 1세).

그는 1935년 5월 12일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전보를 치러 가던 중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모든 사람은 꿈을 꾸지만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밤에 먼지 쌓인 마음의 한 구석에서 꿈꾸는 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 낮에 꿈꾸는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제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렇게 행동했다."_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Thomas Edward Lawrence)의 「지혜의 일곱 기둥」의 서문 中


소명은 현재에 대하여 외부의 관점으로 꿰뚫고 들어와 기독교적 비전과 그리스도인 비전가의 일차적인 근원이 된다.


불타는 가슴과 날개 달린 발

소명 자체가 그러하듯이 소명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불러일으키는 비전에 찬 믿음 역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의 백성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그 유일한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자에게는 안식이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항상 움직이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항상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부르시는 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최종 목적지는 미지의 것일지 모르지만,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는 자는 하늘의 음성과 앞서가는 비전을 갖고 있으며 그 비전은 모든 현 상태를 전복시키고 모든 안식처를 뒤흔든다.

사실상 비전은 소명에서 너무나 중심적이고 너무나 폭발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여러 가지 모조품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현명하다. 소명의 비전은 세 가지 측면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가짜 비전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명은 진정 소명의 결과에 해당하는 비전만을 불러일으키고 보장할 뿐이다. 그 이유는 성경이 경고하듯이, 상상력이라는 중요한 기능이 타락한 결과 인간이 신이 되려는 주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소명의 닻에서 풀려 버린 비전과 상상력은 그 허황됨이 꺼져 버릴 수 있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비전을 오용해서 우리의 자만심과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기 쉽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적 비전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직. 간접적으로 영감받은 것이므로 그만큼 책임을 안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통찰하는 행위로서,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믿음의 통찰력과 가능한 장래의 힘으로 현재를 초월하여 솟구치는 믿음의 예견력을 합친 것이다. 아직 미처 합쳐지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묶어 내는 것이 비전 있는 믿음의 비밀이다. 비전과 현실, 말과 성취, 현재와 미래, 상황과 가능성, 불안정함과 목표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 잘못된 것에 대한 분노와 더 나은 것을 목표로 삼는 것 등 서로 대립하는 짝이 무엇이든 간에 비전 있는 믿음은 그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 한다. 이것이 바로 로렌스의 '한낮에 꿈구는 자'를 공상가와 구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그들이 위험한 인물-"그들은 두 눈을 크게 뜬채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행동한다"-인 이유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비전이 우리를 끌어당겨 빠뜨릴 수 있는 함정을 경계함으로써 비전 있는 믿음을 보호해야 한다.

분파, 진영, 현 상태를 정당화시키는 데 오용(보수주의, 진보주의), "불안정함, 곧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여건 속에 평안한 마음으로 거하지 못하게 만드는것", "왜 안되는가?" 등의 함정을 경계함으로써 비전 있는 믿음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유사품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경계함으로써 비전 있는 믿음을 보호해야 한다. 

'자조'(自助)와 '적극적 사고방식'. 소명이 하나의 객관적인 기준이 되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을 키울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을 건강, 부, 인기, 중요성, 마음의 평안 등에 이르는 열쇠로 여긴다. 그 결과는 바로 이단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믿음을 받드는 믿음이 되어 버린다.

'기사도의 이상', '신앙의 기사', 전투 정신(군국주의, 십자군 원정, 폭력 숭배, 남성 국수주의, 사랑의 우상화, 텅빈 낭만주의와 가식적 태도).

안락함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지난친 문명화'의 결과에 대해 우려하는 세대에 큰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 기초 교육, 시험, 형제애, 희생의 요구 등은 종종 예수님의 소명을 가장한 유사품이고 위험한 편법일 경우가 많다.

오늘날 가장 매력적인 이상은 파우스트적인 노력이다. 역사와 문학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훓어 보면, 그 이야기들이 주는 강력한 경고는 우리 모두에게 타산지석이 된다. 즉 지식, 부, 권력, 성적 기교를 얻기 위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경계선을 침범하는 자들은 결국 파우스트처럼 악마와의 협정에 의해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은 각본을 바꾸어 버렸다. 괴테의 소설에서와 같이 파우스트는 마귀와의 협정을 통해서 정죄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은 노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아픔도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을 야망, 사업, 경쟁심, 탁월성의 추구, 인간 잠재력의 완전한 계발, 권력에의 의지라 부르라. 현대의 삶에서 파우스트적 인간은 열망을 품고 그 경계선을 넘어간다.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망각한다.

오늘날처럼 억제되지 않은 자아(ego)가 커질 대로 커진 시대, 니체는 이런 정신을 탁월하게 부추긴 인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길이 여전히 자신을 인도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모를 때 가장 높이 자란다." 그를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인 한.

한 낮에 꿈꾸는 자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좇을 때 바른 경로를 지킬 수 있다.


■ 묵상 질문

당신의 믿음은 오직 코앞에 있는 것만 보는가, 아니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도 한가? 여기에 지금 있는 것, 현재 용인된 것이 당신의 사고를 제한하는 일종의 감방은 아닌가? 아니면 당신은 이미 붙잡은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향해 뻗어 가고 있는가? 젊은 시절 이후로 당신의 비전은 점차 새어 나가지 않았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값을 지불하면서 비전과 현실의 간격을 메워 가고 있는가? 나사렛 예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