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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소명-오스 기니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소명(The Call)-오스 기니스(Os Gui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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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소명(The Call)-오스 기니스(Os Guinness)


야만성이 지루함보다 낫다?

소명은 죽음에 이르는 죄인 나태함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다.

나태함(sloth)은 한가로움(idling)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가로움은 바람직한 것이다.

나태함은 또한 무기력하게 소파에 파묻혀 있는 것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나태함은 육체적인 게으름 이상의 것이다. 사실상 나태함은 무기력 상태로 쉽게 나타나는 것만큼이나 극단적인 활동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뿌리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 선, 미의 본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상태, 곧 노골적인 영적 낙담 상태를 의미한다. 나태함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내적으로 낙담한 상태로서, 결국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빠져들게 된다.

나태함은 신체를 압도하는, 영과 정서와 마음의 나태함이다. 즉 삶의 의욕 상실, 의미 추구의 포기, 경력의 정체 상태, 도덕적인 탈진, 의지의 마비 상태, 프랑스어로는 '앙뉘'(ennui, 권태)와 '아노미'(anomie, 무질서) 등이다.



현대적인 나태함에는 세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이는 때로는 서로 중복되지만 각각 다르며, 소명은 이 세 가지 모두와 정면으로 충동한다. 첫 번째는 철학적 측면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태, 따라서 영원과 불멸에 대한 믿음도 상실한 상태는 삶 자체의 생명력 고갈로 치닫게 된다.

나태함의 두 번째 측면은 문화적인 것이다. 역동성으로 이룩된 현대 세계는 편리함과 안락함, 소비주의의 세계다. 그리고 삶이 안전하고, 쉽고, 호화롭고, 최신 설비를 갖추게 되면 나태함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역동적 낙관주의의 뒷면에는 지루함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주의의 뒷면에는 안주함이 자리잡고 있다. 강박적으로 쇼핑과 텔레비전에 매인 사람은 기분 좋음에서 아무런 느낌 없음으로 움직인다.

나태함이란 상태는 행동과 폭력과 무질서를 조장하는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안락함과 편리함이 우리 에너지와 이상주의를 고갈시키면 무위(無爲)의 나태함이 혈관에 퍼지는 독처럼 우리 마음속으로 침투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무기력, 싫증, 허무함이 우리를 압도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이상을 낮추려는 유혹에 굴복한다. 그 결과 나태함의 죄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 죄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것에서도 목적을 찾지 못하며, 아무 것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그것이 치명적인 죄라는 점일 것이다."

다윗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에 한가로이 쉬고 있었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유혹에 반 이상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태함의 세 번째 측면은 전기(傳記)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애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마련이다. 역사를 통틀어서 그렇게 되는 가장 흔한 순간은 실패로 인해 실망에 빠지는 때다.

'중년의 위기'는 성공적인 경력, 만족스러운 일, 풍성한 개인적 삶 등에 대한 욕망 사이의 긴장으로 말미암는다,

우리의 소명과 직업 간의 모순은 우리를 부적임자로 만들어 버린다.



소명의 진리는 나태함이 지닌 이 모든 측면에 대해 다룬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에 의해 개인적으로 부름받은 만큼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우리 삶의 매순간과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를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도전받고, 감동되고, 책망받고, 격려받기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편안하고, 미지근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것에 안주할 수 없다. 그 소명은 항상 더 높고, 더 깊고, 더 먼 곳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속 깊은 재능과 열망에 눈을 뜬 이상, 직업보다는 소명을 항상 먼저 고려해야 하고, 오직 소명의 관점에서만 가장 깊은 만족감을 추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현대의 삶이라는 습지에서 메탄가스가 스며나와 우리를 질식시키려 위협할 때마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를 급히 흔들어 깨운다. 우리로 하여금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나태함의 손짓에 대해 소명은 최상의 동기, 곧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잠재력을 다해 그 소명에 응답하기 전에는 결코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명은 하품을 하면서는 응답할 수 없는 그런 부르심이다.


■ 묵상 질문

당신은 당신 자신이 세운 목적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는 좁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당신 주변의 수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미지근함, 지루함, 조용한 절망감을 극복하고 싶은가? 어떤 상황을 꺾을 수 없고, 어떤 실패도 낙담시킬 수 없는 한 가지 목적을 알기 원하는가? 나사렛 예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