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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소명-오스 기니스

18. 창문이 있는 세계/소명(The Call)-오스 기니스(Os Gui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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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창문이 있는 세계

/소명(The Call)-오스 기니스(Os Guinness)


오늘날에는 뉴턴의 사상보다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된 테크놀러지 같은 현대화의 세력들이 '죽음의 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세속화'다.

문제의 정확한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세속화는 현대 세계에서 온전하고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항하는 주요한 도전이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조망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는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문화일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문화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가 종교에 가하는 세 가지 중요하고 해로운 압력 중 가장 크고 으뜸 가는 압력은 바로 세속화다.

소명은 세속화를 지향하는 거대한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영적인 훈련에 정진하고 초자연적인 실재를 경험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 없는 세계

세속화는 사회 및 문화의 여러 부문에서 종교적 이념과 기관들의 결정적인 영향력이 중화되어 버림으로써 종교적 이념이 덜 의미 있는 것으로, 종교적 기관들이 더욱 변두리로 밀려나는 과정이다. 특히 그것은 현대적 의식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해서 오감(五感)의 세계에 제한되어 버렸는지를 보여 준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자연적. 가시적. 실체적인 것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해 열려 있었다.

오늘날에는 세속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통의 실재를 현대 세계의 공식적인 실재일 뿐 아니라 유일한 실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인간은 다른 세계를 향한 창문이 있는 집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피터 버거가 묘사한 '창문 없는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삶 가운데 점점 더 적은 부분이 하나님, 우연, 인간의 자발성에 맡겨지게 되었고, 반면에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이성의 사용에 의해서, 즉 과학과 테크놀러지로 분류 되고, 계산 되고, 통제된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것은 세속화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에게 영향을 준 만큼이나 종교적인 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는 초자연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상은 무신론자다.





예수 그리스도를 쫓으라는 소명은 

첫째, 예수님은 명백히 우리를 초자연적인 차원을 지닌 질적으로 차별성 있는 나라와 삶으로 부르셨다. 

"영성은 '또 다른 실재'의 문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영성은 다른 실재, 다른 에너지, 다른 가능성, 다른 전망을 지닌 다른 세계의 문제다.

영성은 우리가 초자연적으로 거듭나고, 훈련을 통하여 그것이 우리의 정규적인 거처가 되게끔 배울 때에만 들어갈 수 있는 차원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났다'고 큰 소리로 외쳐 대지만 실제 삶에서는 초자연적인 차원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흔하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실 뿐 아니라 친히 영적 훈련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에게 영성은 활동적인 삶과 유리된 관조의 삶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짧고도 가장 바빴던 그분의 공식 삶에는, 단지 개입과 물러남, 일과 휴식,  사역과 재충전, 군중과 고독 같은 리듬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고갈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세속적인 삶 역시 초자연적인 해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초자연적인 경험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탐닉과 자만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환상의 산꼭대기에서 우리의 소명이 있는 일상적인 삶의 골짜기로 내려가야만 한다. 신약 성경에는 수도원이나 수도사의 자리는 없으며, 단지 힘겨운 일상의 세계에 사는 영적으로 훈련된 제자들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셋째, 예수님은 소명 자체를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구체적인 영적 훈련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영적 훈련'(spiritual discipline)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및 그분의 나라와 좀더 효과적으로 협력하도록 해주는 한 가지 활동일 뿐이다." 

고독은 우리가 현대 문화의 과잉에 대항하도록 훈련하는 데 꼭 필요하다. 고독은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몰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고독은 우리에게 혼자만의 장소를 제공해 준다. 그 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주님을 북극성으로 삼아  우리가 사회로 돌아갈 때도 여전히 그분께 고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은 구체적인 장소이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상태다. 그것은 홀로 있는 것이지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대하든, 고독은 우리 삶의 움직이는 제단으로서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예배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휴일(holiday)을 '휴가'(vocation)로 여기는 것은 최근에 생긴 사고 방식인데, 이는 과거에 휴일을 '거룩한 날'(holy day)로 보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를 택해서 그 사회의 여가관을 기독교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쉼과 영적 훈련에 대한 그리스도의 견해를 깊이 상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제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 묵상 질문

당신은 창문 없는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돈을 버는 것보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느끼면서 쫓기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이성과 실용성만을 계발하여 믿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영적 전쟁의 무기가 무디어지지는 않았는가? 당신은 엘리사의 사환처럼 "불말과 불별거가 사방에 둘러선 것"을 볼 수 있는가? 나사렛 예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