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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톰 라이트

1 1. 비전,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새 출발을 꿈꾸다/ Part 2 톰 라이트, 1세기 예수를 만나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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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은 말하자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평생 한 번의 ‘출애굽’이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재정의하심


성전은 만물의 구심점이고,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지점이고, 성지의 중심부였다. 성전은 세상을 피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교두보였다. 성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 전체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되찾으시며, 그 한가운데에 자신의 영역을 세우고 계시다는 표시였다. 특히 성전은 하나님이 오셔서 사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신 곳이었다. 하나님의 영광, 거하시는 임재, 그분의 쉐키나(Shekinah)가 임하여 머문 곳이 바로 성전이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였고, 신기하게도 성전은 세상의 중심지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하늘’과 ‘땅’이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겹쳐져 있고 맞물려 있다는 세계관의 중요한 표현이었다.

하늘과 성전과 땅


예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왕이 되시는 중이고, 주관하시는 중이고, 오랫동안 고대해 온 그분의 구원과 치유의 통치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세우고 계시는 중이라고 말씀하고 다니셨다. 하늘과 땅이 연합하고 있었다. 단, 그 장소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연합의 장소는 치유가 벌어지고 있는 곳,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 용서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계신 곳과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이 곧 연합의 장소였고 원이 겹치지는 부위였다. 예수는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성전이셨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 숨 쉬는 자리이셨다. 성육신의 교리의 핵심.
예수는 자신이 성전의 화신인 것처럼 행동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중이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이 하는 일들로 하나님이 왕이심을 실행해 보이셨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성전은 말하자면 대대로 눈에 띄지 않았던 또 다른 실체를 가리켜 보이는 큰 표지판이었다.

그 기초는 다윗의 아들이자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었다.

장차 올 다윗의 후손이 궁극적 실체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 실체를 미리 가리켜 보이는 표지판이다. 이제 실체가 왔으니 표지판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이 그분의 아버지가 하시는 일의 절정이었고, 이제 그 일의 구심점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다.

이렇듯 예수는 놀랍고 위험하고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한 비전을 행동에 옮기셨고, 자신이 성전인 것처럼 행동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신성한 공간을 재정의하셨다.

때가 차매


선형(線形)으로 진행되며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이전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되 하늘과 땅을 모두 자신의 용도를 위하여 지으셨다는 의미다. 집을 짓는 사람처럼 하나님도 일을 마치신 뒤 그 안에 입주하여 자신이 지으신 것을 즐기셨다. 창조 세계 자체가 하나의 성전, 궁극의 성전, 하나님이 사시도록 지어진 천지간의 건물이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이후의 연속될 시대들을 가리켜 보이는 표지판이었다.
앞날을 내다보는 그 표지판에는, 훗날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들이 다 이루어지면 궁극적 완성의 순간이 오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순간이 오면 마침내 일이 다 이루어져,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안식하시고 자신이 이루신 일을 즐기실 것이다.

다른 차원의 시간을 즐거워하는 기회였다. 안식일은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만나는 날이었고, 매일 계속되는 고생과 수고를 접어 두고 다른 종류의 시간 속에 들어가 최초의 안식을 기념하고 최후의 안식을 고대하는 날이었다. 즐거워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는 자연스러운 순간이었다. 안식일은 첫 도입부에서 마지막 종결부로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안식일과 시간의 관계는 성전과 공간의 관계와 같았다.

성경의 희년은 하나님의 시간이 주 단위로, 7년 단위로, 반세기 단위로 묶여져 있음을 늘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안식 중의 안식이 시작되는 순간에 등장하신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가리켜 보이는 정식 표지판이었는데, 예수께서 이제 그 표지판이 가리켜 보이던 미래가 현재 속에 도래했다고 공표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그분의 공생애를 통해 도래했다. 그분은 ‘하나님이 이제 왕이심’을 행동으로 보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셨다. 바야흐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 표지판이 필요 없는 법이다. 때가 차면 안식일이 필요 없어진다. 때가 도래했고 미래와 새 창조가 이미 여기에 있으니 더 이상 안식일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안식일에 관한 율법이 이제는 폐기되어도 좋은 어리석은 규정은 아니었다(물론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일부 시시콜콜한 안식일 규정들은 터무니없는 극단으로 치달아, 예컨대 안식일에 나귀를 우물에서 끌어내는 일은 허용되었지만 병자를 고치는 일은 금지되었다). 안식일 규정은 표지판이었는데, 그 표지판의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안식일 규정은 때가 차게 될 그 시점을 가리켜 보이던 이정표였는데, 지금 그 시점이 임하고 있었다.

이제 안식일의 목적이 있다면, 창조 작업을 마치고 쉬기 위함이 아니라 사탄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즐거워하기 위함이다.
진짜 전투에 이기는 승리는 하나님이 왕이심을 드러내는 치유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물론 이런 일들은 때가 찬 순간에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살아 숨 쉬며 걸어다니는 성전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승리를 즐거워하며 걸어다니는 안식일이시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사역을 출범시키시고, 또한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극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으로 다 이루신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은 성취의 때다. 하나님의 새 창조 즉 그분의 새로운 실체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가까운 개인적 차원에서 출범되는 때다. 하지만 자칫 사람들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취의 때에 수반되는 경고다.

새창조


이신론은 에피쿠로스주의라는 고대 철학의 현대판으로, 하나님 내지 신들이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고 지구가 철저히 자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상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이제 주관자이시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왕이 되시는 중이라고 공표하셨다. 이는 그 예언된 비전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예수께서 계신 곳과 그분이 하고 계신 일 속에서 잠깐잠깐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물질계 자체가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몸이 물리적으로 변화된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느끼신다(막 5:30). 이처럼 창조 세계는 이를테면 새로운 지휘부의 관할을 받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나(또 하나의 철학적 오류다) 그냥 가끔씩 세상에 ‘개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일종의 맥 빠진 타협적 입장이다) 세상을 자신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오히려 그냥 새 창조의 특징들, 때가 차서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날 때 벌어지는 일의 특징들인지도 모른다.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고 있고,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마침내 만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굵고 짧은 기간 동안 하나로 수렴하고 있고, 하나님의 새 창조와 현재의 창조 세계가 뜻밖에 서로 조우하고 있다.

예수 자신께로 내려왔다. 예수의 삶 안에서 물질계 자체에 벌어졌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물리적 몸 자체에 벌어졌다. 예수는 하나님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이 만나고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만나는 곳인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물질(하나님의 새 창조)이 우리의 물질과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순간은 일련의 새로운 표지판들의 한 부분을 이루며, 예수 모양의 그 표지판들은 장차 완전한 새 창조가 이루어질 것을 보여 준다. 새 창조가 시작되는 씨앗은 예수 자신이고, 이 땅에 뿌려진 그 씨앗이 자라서 새 세상의 시발점이 된다.

새로운 종류의 혁명


하나님은 지금 여기 ‘땅’에서 왕이 되시는 중이고, 그 일이 벌어지기를 위해 그들이 기도해야 하고, 그 일이 정말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들을 그분이 하시는 일 속에서 알아보아야 하며, 그분이 일을 다 이루시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세계에서 ‘하늘’이란 단어는 ‘하나님’을 경건하게 일컫는 말일 수 있었다. 늘 ‘땅’을 다스리는 곳이었다. ‘하늘의 하나님’은 바로 땅의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며(단 2:37), 결국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
분이다(2:44, 참고 4:37; 5:23).

당연히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으셨다. 또한 당연히 그분은 일을 다 이루려면 또 다른 큰 행동이 필요하심을 믿으셨다.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보여 주는 수백 가지의 생생한 예증을 통해 행동으로 표현되었고, 옛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수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설명되었다. 통상적 부류의 혁명을 그만두고 대신 전혀 다른 방식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통상적인 ‘저항’ 운동들에 가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분의 ‘정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끼워 맞추려 한 틀들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할 사람들을 기르셨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일과 공생애와 존재 자체를 성전과 안식일과 창조 세계가 가리켜 보이는 실체로 보셨다. 1세기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보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 하나님의 화신으로 이해하셨다는 확실한 표시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또한 그분이 하시는 일들도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되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는 것이었고, 예수께서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복음서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으로 밝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왕이 되셨는가”이다.

성경의 교리는 하나님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왕이 되어 다스리신다는 훨씬 큰 도전에 직면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들의 주제다. 또한 바로 예수의 이야기의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이 진정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