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드뷰/2016. 1월호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김헌수/월드뷰 2016년 1월호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김헌수/월드뷰 2016년 1월호


16세기의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살펴보기



하이델베르크에서 온 세 사람_ 프리드리히 3세


나의 위로와 비참을 살펴보는 요리문답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인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나의 비참함과 위로에 대한 성경적 교훈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사 49:13)

"9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사 52:9)

"12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25    예루살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1)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ㅁ)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1)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6~21) 



하이델베르크에서 온 세 사람_ 올레비아누스


나의 위로와 비참한 현실- 16세기와 21세기

첫째, 16세기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개인이 경험하는 위로로 고백하되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서 고백하였다.

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위로의 근거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위로는 나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지, 나의 경험이 위로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비참함'이라는 요리문답의 표현은 16세기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데 기여한 세 사람-프리드리히 3세,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은 모두 개혁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였고 주님의 섭리로 인해 하이델베르크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은 고향에서 추방된 사람들이었고 나그네의 비참함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비참함'을 개인적인 느낌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낙원에서 쫓겨난 망국민(亡國民)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비참함이다. 이러한 비참함은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성도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온 세 사람_ 우르시누스


위로와 비참함에 대한 바른 이해는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고 한다. 카톡, 페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난데, 그것은 '소속감'과 관련이 있다. 생활이 더 바쁘면 바쁠수록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있어서 사회 관계망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한 21세기의 우리에게 16세기의 선배들은 '위로와 비참함'을 화두로 던진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단어에서 진정한 소속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